본문 바로가기

까칠한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개인적 회개가 아니라 사회적 반성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이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가르쳐 준 가장 완성도가 높은 기도문이다
그런데 가장 완벽한 기도의 처음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는가?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지 못해왔다.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에서부터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비판적 유신론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이름이 심심풀이 땅콩 캬라멜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정작 가장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지 못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믿은 크리스찬으로부터 
말미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똑바로 처신하지 못해서 치욕을 얻으시는 분이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요즘 동네 교회들은 신자수가 줄어든다고 아우성이다. 대형교회들의 메가처치화도 한몫을 하지만
기득권 층에 대한 실망이 자신의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가져왔다고 보는 이도 있다. 

"공의의 하나님' 공정하고 의로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의 세상을 읽으며
하나님이 공평하다는 것에 동의할 일반인을 없을 것 같다. 

[긍정의 목사 조엘 오스틴 하지만 '잘되는 나'의 '잘됨'의 진정한 의미는 논랑의 대상이다]

교회에는 복 받고 승리한 삶에 대한 간증이 넘쳐난다. 하지만 교회 안에 실패하고 패배한 삶에 대한 진단은 
인색한 것 같다. 결국 교회 밖에서 소위 말하는 안티기독교라는 집단의 비아냥과 비난을 받을 뿐 교회 시스템 안에서 신 앞에선 인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해석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극단적인 말이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하고 구하던 것을 얻은 믿음의 소유자들은 계속 살아남지만 아닌 자는 소리없이 교회로 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류의 사람들에게 시험들었다 라고 표현하지만 
이런 삶의 굴곡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성공한 간증이 넘쳐나는 교회보다는 상처입고 실패한 사람들의 사연에 대해 감싸주고 치유해 주는 곳이 진정한 예배당이며 교회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복음 12:34 -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의 마음도 있으리라]

한국의 교회가 위기를 맞게 된 것은 오래전의 일이지만 IMF 이후 삶의 모든 패더라임이 부와 연관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종교인이니 비종교인이니 할 것 없이 잘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돈을 숭배함이 더 이상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해지기 시작한 때부터인 것 같다. 

이제 교회에서도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전제로 여러가지 조건을 달기도 하고 깨끗한 부자, 선한 부자, 청렴한 부자 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에서 그렇게 자유로와 보이지 않는다.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현재 기득권 세력들은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가? 강남의 부동산 왕국에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 더 가까운 사람들인가? 



마가복음 10: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이것이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자기 모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모순 속에서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개인주의 적인 회개를 강조하는 종교적 색채를 띠다가 기득권의 권력과는 원만한 교류를 통해 중요한 사회적 결정에 대해서는 묵인 또는 적극적 반대 의사표현으로 세상을 불공평하게 만들고 있다.

기독교의 몇몇 지도자들은 자기가 하면 의로운 행동 남이 하면 정치 활동이라 낙인 찍는 것 같다. 그리고 좀 더 세련된 교회에서는 교인들끼리 정치 이야기 하는 것을 가급적 자제하라고 종용한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에 길들여진 교인들은 만족해 하며 자기 목사님이 훌륭한 분이며 사회보다는 개인의 회개를 중시하는 기독교의 교리에 충실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정치문제에 대해 자제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그 순간 대단히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문제가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가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가 되지 않는한 우리는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게 살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 돈을 버는 직장, 밥을 먹는 식당, 물건을 사는 가게 이런 우리 삶의 필수요소들이 결국 정치적인 결정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하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또는 비참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에 인정하면 그 말은 곧 정치적 인간이라는 말에도 동의하는 것이다 

프랑스 떼제 공동체 소예배실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프랑스 남서부의 플럼빌리지가 불교공동체라면 떼제는 프랑스 동부 브르고뉴지방에 위치한 카톨릭 공동체이다. 1940년대에 로제수사께서 만드신 곳으로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플럼과 떼제를 찾아보고서 느낀 점은 참다운 종교는 그리 많은 말을 하지않고 매우 단순하고 평화롭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말많은 종교인들을 모두 견학시켰으면 하는 그런 곳이었다.
점심 미사에 참석했었는데 나는 솔직히 언제 예배가 끝났는지도 모를정도였다. 기도와 침묵 그리고 찬가....

2005년 10월 떼제에서

장로 대통령의 탄생을 많은 기독교의 목회자들이 바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대로 아니면 그들의 바램대로 장로 대통령이 당선된지 2년이 지나간다. 여전히 노골적으로 장로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는 목사도 있고, 침묵하는 목사도 있고, 자기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목사님도 계신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는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 

그 원인은 밖에 있지 않고 그 내부에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안티 기독교들이 한국의 교회를 망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최소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교회를 타락시킬 수 없다. 그들은 교회 밖의 인물들이고 믿지 않는 일반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있을 따름이고 훌륭한 목회자 밑에서 잘 훈련된 훌륭한 성도는 천박한 안티 기독교의 몇마디 말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도수가 줄어들고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일어나는 것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해결책은 밖에 있으니 세상이 바껴야 한다고 생각 한다면 큰 오산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일제시대 때도 저항을 하지 않았고 이제 명백히 밝혀진 혹독한 군부독재시대를 거치면서도 사회적 개입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들의 하나님 앞에 홀로 선 개인적 신앙관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믿어주고 싶다. 또한 죄인이고 부족한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논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각 종교계는 광우병 파동과 4대강 사업에 대해 종교적 양심을 걸고 권력에게 자신의 소리를 내는 데 비해 유독 기독교는 도리어 청개구리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예전과는 다르게 침묵하지도 않으며 몇몇 목회자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적 발언들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개인적 신앙관하고도 맞지 않으며 사회적 이슈에 참여하지 않는 그들의 행동 양식과는 더더욱 맞지않다.

이렇듯 기독교는 현재 자가당착적이면서도 이율배반적인 자기 정체성의 문제까지 가지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간한 믿음을 갖지 않으면 교회 시스템 안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며 새로운 신자가 탄생하기 힘든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세상에는 종교가 말해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종교의 순기능도 있기에 신의 유무와 상관없이 종교는 역사와 함께 세상과 공존해 왔다. 

[사도행전 4:32~36 - 기독교의 교리는 절대로 보수적이거나 기득권적이지 않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장로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커다란 혼란에 빠진 것 같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만족하는 데 그 종교를 떠받치는 신도가 사라져 가는 웃지 못할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문제를 문제라고 여기지 않으면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기독교가 정말로 사람을 구원하는 궁극의 진리를 추구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개인적인 회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속한 이 사회안에서 깊은 반성이 필요한 것 같다. 예수님 앞에 회개가 원죄까지도 해결해 준다는 기독교의 무한한 용서의 의미가 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불의와 거짓과 속임수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없다는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는 분별이 필요한 것이다.  

얼마전 기독교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내려놓음' 이라는 책이 있었다. 한 선교사의 더 얻으려고 하기보다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나아갔더니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인도해주셨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젊은 청년들 그리고 일반 신자들한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려놓으려면 많이 가진 자가 내려놓아야 한다. 얼마 가지지 못한 자는 내려놓기도 쉽고 내려놓을 것도 얼마 없다, 그런데 많이 가진 것이 많아 내려놓을 것이 많아 결단을 해야할 분들은 정작 이 책을 보지 않으신 거 같다. 먼저 목사님들부터 그리고 장로님들부터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가장 곁에 두고 필독하셔야 할 것이다.

'무소유' 보다 어쩌면 '내려놓음' 이 더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처음부터 소유하지 않는 것은 그 가진 자의 매력을 모르기에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가져본 사람은 그 부와 권력이 주는 매력을 충분히 알기에 내려놓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기독교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자기들에게 필요 이상의 것에 대해 반성하고 내려놓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인간의 죄 때문이고 그 중에 가장 큰 죄인은 자기 자신이기에 철저히 회개로 나아가야 한다면 더 많은 묵상의 시간을 가지며 일관되게 침묵으로 나아가야한다.  그런데 어떤 대통령이 한국을 위해 필요한지 자신의 기준을 신도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강요하고 잘못된 일에 대해 자신의 이익에 따라 국민의 건강한 여론에 물타기 하는 집단은 신 앞에 먼저 회개가 아니라 사회적 반성이 앞서야 한다.  

사회적 반성이 없는 개인적 회개를 받아주실 하나님은 그들만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포로된 자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아닐 것이다. 



누가복음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마태복음 5:3
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