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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한

영화 더그레이'The Grey' 블로그 리뷰를 새롭게 다시 쓰는 이유

매일 시사와 정치 이야기만 쏟아내다 보니 나 스스로도 지쳤고, 보는 독자들도 힘드셨으리라. 물론 나의 블로그가 충성도 높은 고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이 검색과 포탈을 통해 들어오는 지나가는 손님이라고 하여도, 남겨진 소수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흥미거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손바닥 꾹><추천 꾹>




나비오의 쿨한 무위도식 블로그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처음에는 스마트폰과 관련된 IT 블로그였습니다. 그런데 시기가 시기인 만큼 미디어를 가장한 정치 시사 블로그가 되었고 지금은 대선과 언론의 불공정함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언제까지 정치 시사 이야기를 쏟아낼 것이냐고? 나의 전문 분야도 아니고 내가 잘 아는 내용도 아닌 정치와 시사를 오랫동안 풀어나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올해 대선까지만 하다가 그만 둘 것이라고,


이것은 김어준이 가카가 하야하면(정권이 교체되면) 나꼼수 방송을 접겠다고 선언한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쿨한 무위도식도 얼마남지 않은 대선에서 정권이 온전히 교체된다면 어려운 정치,시사 이야기를 그만 접고, 정말로 공유하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가지고 독자들을 찾아갈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팝송에 대한 이야기, 젊은 시절 세계 여러 곳을 다녔던 여행의 기록들, 그 무엇이라도 좋다. 정권만 교체된다면 일상다반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블로그로 담아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세상의 어두운 곳을 블로그에 담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은 것 같습니다. 그때가 되면 내가 담아낼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것이 어둠이라고 여기고 바로잡겠다는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있으리라. 그래야만 나비오의 쿨한 무위도식이 블로그 제목대로 쿨한 무위도식의 세계를 향해 즐겁게 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영화 '더 그레이'의 기존 리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리뷰를 새로쓴다


그래서 오늘은 영화 리뷰 한편을 준비했습니다. 영화 제목은 '더 그레이'(The Grey) 이고, 올해 개봉된 영화로 국내에서는 흥행이 저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전에 B급 영화로 알려진 조 카나한 감독 보다는,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리암 니슨'의 이름을 등에 없고, 또한 리들리 스콧 형제가 제작에 참여하였다는 백그라운드를 달고 국내에 상륙하였지만 일개 자연 재난 영화로 평가받으며 일찍 간판을 내렸던 것으로 압니다. 


현재의 히트작도 아니고 과거의 명작도 아닌 영화를 가지고 이렇게 시의적절하지 않게 리뷰를 올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재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영화평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입니다.


언노운, 테이큰의 리암 니슨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가 흥행 영화의 액션 배우라는 이미지가 너무 굳어서 이와 같은 스케일의 영화에 나오니 당연히 흥행 영화를 바랬을 것이고, 내용도 헐리우드 템포에 익숙하게, 스트레스 킬링 타임을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영화를 보고 리뷰를 하려니 대부분 자연 재난 영화의 모습, 그리고 결말이 허무한 영화로 평가 내리며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평가 점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리뷰를 쓰고 그런 리뷰가 인터넷 공간에 회자 되다 보니 진한 감동이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대접을 못 받는 것에 대해 약간에 열불이 났습니다. 저는 요즘 보는 사람마다 '더 그레이'를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 삶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을 보여줌으로 우리가 인생에 대해 '결의'를 가지게 되고 '영혼의 힘'을 다시 붙잡게 만듭니다. 이것이 훌륭한 영화의 사회적 역할이 아닐까요? 







▲  삶이 힘들 때 꺼내 볼 수 있는 영화


나는 예전에는 삶이 너무나 버겁고 힘들 때마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다시 꺼내보곤 했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위안을 받았고 내 안에 어려운 짐들이 치유됨을 느꼈고, 내일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훌륭한 영화 한편은 사람에게 힘을 주고 위안을 주며 치유가 가능토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 내가 본 '더 그레이'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힘'을 가진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영화 '더 그레이'의 가치를 다시 한번 올려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느꼈던 치유와 힘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기도 합니다.





▲ 영화의 줄거리


영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지구 한 쪽 끝 정유회사에 일하던 직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알래스카 설원에 추락하면서 영화는 전개됩니다. 주인공 오트웨이(리암 니슨 역)는 설원에 자리잡고 있는 정유회사에서 출몰하는 야생 동물을 제거하는 스나이퍼의 역할을 담당했었고 그 역시 추락하는 비행기에 탔던 것입니다. 


생존자는 몇 명 되지 않았고 이들이 맞딱드려야 하는 것은 알래스카의 추운 날씨와 눈보라 그리고 생존자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늑대들이었습니다. 추위와 눈보라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위협이었고, 매 시간 쫓아오는 늑대들의 공격은 현실적인 삶의 공포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다는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Don't be afraid" 영화의 주인공 오트웨이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하며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날 자살을 시도합니다. 실연의 아픔이 삶에 대한 버거움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그는 술집 뒷마당에 나와 총구를 입에 머금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살의 시점을 뒤로 하고 비행기를 탔고 추락 이후에는 그 누구보다 살려는 의지가 높은 한명의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사람은 빈 들녁의 바람을 그리워한다'고 했는가요?. 삶이 버거울 때는 우리는 자칫 삶을 내려놔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삶의 조건이 부재해지면 우리는 삶의 끈을 너무나 집착스럽게 잡아당기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더 그레이'의 주인공 오트웨이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일행을 이끌고 늑대의 공격을 뚫고 설원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 그레이의 설원은 우리 삶의 바닥


알래스카라는 설원은 우리 삶의 바닥을 상징하고, 호시탐탐 생명을 위협하는 늑대들은 삶에서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상징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보라와 추위가 주는 공포보다 늑대가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늑대의 울음소리로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늑대가 공격해 와 우리의 동반자를 죽이고 빼앗아 가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 삶의 과정이며 축소판인 것입니다. 


늑대가 공격하지 않아도 늑대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공포에 휩쌓이고 두려워하는 마음, 두렵기 때문에 한발짝 더 앞으로 내딛기가 힘들어지고, 공포에 노예가 되면 마지막 남은 여정을 포기하고 삶으로 돌아가기를 그만두게 만드는 것입니다.


 






▲ 사랑의 언어 "두려워하지 마세요" 


주인공 오트웨이가 사랑했던 여인은 영화 내내 주인공에게 환영으로 나타나며 "Don't be afraid'를 속삭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리 두려운 것이며, 삶은 왜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이며 생명이 있기에 가꾸고 단련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잘 살고, 못 살고, 잘 생기고, 못 생기고 여러 가지 변화가 주어지면 우리의 삶은 정해진 것 없이 너무나 다채롭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 주인공과 일행을 쫓아가며 공포를 주는 늑대는 우리 삶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가난, 질병, 실연, 우울 등 현대인의 고질적 괴로움을 공포의 대상이라 지목하지만 저는 이런 표면적인 것보다 우리 인간 본질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더 그레이'에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위협하는 것은 늑대가 맞지만 늑대 역시 자연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이유는 인간이 그들의 영역에 침범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때 늑대는 나쁜 악이 아닙니다. 인간의 시점으로 보았을 때 늑대가 적일 뿐, 커다란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더 선하고 악한 것인지 구분하기는 힘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편이지, 자연이 인간의 편은 아닌 것입니다. 아니 인간은 스스로기 자기 편일 뿐 타자가 나의 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외롭습니다. 인간은 손을 뻗어 상대를 만지고 입을 열어 대화할 수 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내가 될 수 없고 내가 가진 외로움과 절망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침잠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은 존재적 '외로움'입니다. 이 외로움은 영화 속 늑대가 주는 것도 아니고 자연의 경이가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단지 원래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 것입니다. 




 ▲ 영화 '더 그레이'에 비쳐진 사랑


친구에게 사랑을 통해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육체적 사랑, 사랑하는 아이들, 행복 등 여러가지가 나올 수 있는 답변입니다. 그런데 영화 더 그레이에서는 무척이나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오트웨와 연인 간의 사랑의 장면입니다. 사랑의 장면이라 하여 격정적인 베드씬이 아니라 아침햇살이 내리비치는 침대에 연인이 옆으로 누워 서로의 눈을 응시하면서 여자가 남자의 볼을 어루만져 줍니다. 

 

격정적인 사랑보다 어쩌면 더 사랑스러운 장면입니다. 왜냐구요 열정은 타고 없어지지만 위로와 치유는 흔적이 되어 가슴이 남습니다. 육체적 사랑은 기억될 수 있고 감각의 흔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있지만 추억이 되어 마음에 자리잡지는 못합니다. 인간이 원하는 사랑은 궁극적으로 서로의 품에 안겨 살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위안과 치유 입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지 않았더라면 '즐기는 것'이 사랑이 본질이 되었건만 천국에서 멀어져버린 인간의 사랑은 치유와 위안이 주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그레이에서 말하는 사랑이 주는 치유와 위안의 언어는 '두려워하지 마세요' 입니다. 




▲ 남자의 영화 '더 그레이'


어쩌면 영화 '더 그레이'는 남자의 영화일 수 있습니다. 남자적 관점에서 숫컷들이 싸우고 극복하고 인내하는 영화입니다. 남녀평등이 이루어진 사회에서도 한 가족의 가장은 '남자'입니다. 여성의 지위가 아무리 높아진다 하여도 가정에 물리적 위험이 닥쳤을 때, 앞에 나서야 하는 것은 남자입니다.


하지만 남자나 여자나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이고 마음의 담대함 역시 비슷합니다. 단지 남자는 겁 먹은 척하지 말아야 하는 태도를 강요받아온 것이고 여자는 두려움이 인정되는 사회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더 외로울 수 있습니다. 무섭지만 무섭지 않다고 해야 하고, 떨려도 떨지 않아야 하는 태도를 강요받아 온 것입니다 


'더 그레이'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 역시 모두 남자입니다. 막노동꾼답게 매우 거칠고, 천박한 언어를 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두려움이 더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밖에 안됩니다. 





▲ 두려움의 빛깔 , 회색 


영화 더 그레이는 회색 빛의 인간의 두려움을 너무나 잘 묘사한 영화입니다. 죽음이라는 검정색도 아니고 생명이라는 흰색도 아니 죽음과 생명 사이의 회색빛 두려움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생이 제 각각이듯이 인간마다 공포의 실체는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더 그레이'의 명대사가 하나 나옵니다. 






다시 한번 싸움 속으로 

내가 아는 최고의 마지막 전투 속으로 

바로 오늘, 살고 죽을 것이다

바로 오늘, 살고 죽을 것이다 


 

주인공 오트웨이는 결국 혼자 남게 됩니다 건강이 약한 자, 늑대에게 공격당해 죽은 자, 낙오한 자를 떠나보내고 늑대굴의 우두머리와 맞딱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위의 시가 나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기 전에는 자살을 꿈꿨고, 함께 했던 동반자들을 모두 빼앗긴 체 혼자 남았고, 하늘의 신에게 절실한 기도와 온갖 욕설을 퍼붓고는 자신의 가장 힘들게 했던 적의 수장을 만난 것입니다. 




[모든 사진 : 더 그레이 (The Grey) 홈페이지]




여기서 주인공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지금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유품(지갑)을 잘 정리하고는 조그마한 호리병을 손가락 사이에 찔러 넣은 후 깨뜨려 손등에 무기를 장착하고 한 손엔 칼을 들고 적을 향해 돌진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지막 최고의 전투를 향하여 두려움의 본질 속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입니다 .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랑하는 연인의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주문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이 들어갈수록 육체의 연약함을 알게되고, 정신의 힘마저 사그러드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에게 다가오는 두려움은 크기를 더하고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의 삶을 흔들어 버립니다. 




▲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화에서는 '사랑'이라고 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네 삶을 돌아보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도 더 이상 흥분되는 것도 어느 시점이 지나가면서 사그러지게 마련입니다. 그때 밀려오는 허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인생을 행복 또는 절망으로 바라보느냐의 기로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새힘을 얻고 척박한 인생 가운데 강력한 죽음이라는 적을 향해 달려들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전해주는 응원의 한마디, 내 안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사랑'의 메세지, 그때 우리가 사랑을 붙잡을 수 없다면 깊은 절망이나 허무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삶의 어둠을 향해 달려들어 싸울 있다면 결과와 상관 없이 자신의 삶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가지지 못한 대부분은 사랑 없이 적을 향해 돌진하거나 상황을 외면해 버리고 뒷걸음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영화 '더 그레이'를 보면서 처음에 가졌던 자연 재난 영화 중 하나라는 생각은 사라졌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재난 영화가 아니라, 우리 삶의 재난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것을 서사로 표현한 작품인 것입니다. 감독이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더래도 장면 하나 대사 한줄에도 인생의 철학과 깊이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유럽의 예술 영화만 수준 높은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사와 상징을 가지고서도 우리 삶을 표현해낼 수 있고, 인생의 교훈과 영혼의 힘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 삶 최고의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 삶이 지치고 힘들 때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영화 '더 그레이'


저는 앞으로 삶이 지치고 힘들 때, '더 그레이'를 다시 꺼내 보면 힘을 얻어볼까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를 때, 답답하고 힘을 빠지며 전의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그레이'와 같은 인생의 두려움과 사랑의 서사시를 보면서 우리는 대강의 두려움의 윤곽을 가늠해 볼 수 있고, 두려움에 굴복하여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무기만으로 최대의 전의를 불태우며 달려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위안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짜피 인생에 있어서 결과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돌진해 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진실 했다면 돌아봐도 후회가 없을 것이요 거짓이 섞여 있었다면 과정도 결과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화 '더 그레이'가 자연 재난 영화라는 평가와 결말이 허무하다는 졸평에 발끈하여 저의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꼭 한번 영화를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특히 남자 나이 30을 훌쩍 넘겼다면 인생의 예방 주사라고 생각하시고 꼭 보시길 바랍니다. 뭔지 모를 감동이 목에 걸린 눈깔 사탕마냥 마음을 멤돌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감동'이라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