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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러시아 인종차별] 사막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아십니까?





어린이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이 누군가를 놀릴 때는 원색적일 때가 많다.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순수하다는 증거이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매우 나쁠 수 있다. 
어렸을 때 흑인이 다가오면 어린이는 흔히 '깜둥이'라는 단어로 주위를 얼어붙게 만든다. 옆에 엄마는 난처해서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아이눈에는 '흑인'의 뜻을 모를 뿐더라 상대가 험하게만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재미있다. 엄마의 걱정은 사실 이것이었다. 옆의 흑인이 자기를 비하하여 부르는 '깜둥이'이라는 말을 알아 듣고 헤코지지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다. 그러나 한국에 오래산 흑인은 그것을 마치 서양에서 그들을 ' 니그로' 라 비하하듯이 한국에서 부르는 비속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백인이 살고 있는 '선진국'에 가면 많은 인종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자국의 경제사정보다 단순노동에도 높은 인건비를 제공하는 선진국의 임금체계에 매력을 느껴 이주를 결심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거기에 가면 또 하나의 한국형 비속어가 존재한다. 

'사막애들' 흔히 '사막'이라고 부르는데 아랍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랍인들에게 아랍 어쩌구 하면 자기를 지칭하는지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괜한 헤코지를 당할까봐 유학생들 또는 한국인들끼리 그들을 지칭할때 쓰는 은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을 사막 이라고 부르는가? 백인한테 우리가 흰둥이라고 부를 일은 없다.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인종차별의 뿌리가 작용하는 것일 수 있지만 실제로 외국생활에서 아랍인들에게 위협을 당해본 사람들은 인종차별 반대니 하는 대의에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이주해 온 아랍인들은 빈부차이가 극심한 국가에서 온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 가장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아랍 사람인데 비해 거리의 부랑아 대부분은 아랍인들이다. 그래서 범죄가 많고 트러블 메이커로 인식되어진다.

호주에 사는 성격 완만한 한국 총각은 집을 고르는데 유일한 조건이 그 건물에 아랍인의 거주 유무라고 했다니 말 다했다. 

항상 이론과 실제는 많은 차이를 갖는다. 



[러시아의 네오 나치당원들]


3월 8일 뉴스에 한국 유학생이 러시아의 인종주의자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얼마전 한국유학생 사망 이후 두번째 러시아 인종주의자에 의한 한국인에 대한 폭력인 것이다. 현재 한국 유학생은 중태란다. 보도된 것이 이정도이면 숨겨지거나 지나친 사건은 더욱 많을 것이다. 
극우파라 일컫어지는 철없는 청년들이 혈기에 넘쳐 했다고 하기엔 그 방식과 범행 후의 태도들이 심상치 않다. 공부하러 안 갈 수도 없고 한국의 특공대를 보내 일망타진 할 수도 없다. 

세상은 점점 강팍해지고 불의로 물드는 것 같다.

아시아에 놀러온 서양인들은 환영받는다. 서양인이 다가와 뭐라 하면 우린 익숙치 못한 영어로 과잉 친절을 베푼다. 

어느 외국인이 방송에 나와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준비도 하지 않고 남의 나라 와서 언어소통 못하는 것은 대접 받을 자격이 없다고..거기에 있던 한국 사람들 다 끄덕였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외국에 나갔을 때만 해당되지 외국인이 한국에 왔을 때는 해당되지 않는다. 오직 웰컴 코리아인 것이며 도리어 자신의 부족한 영어실력을 자책한다.

인종문제는 이렇듯 아주 복잡미묘하다.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하는 프랑스가 인종 문제에 대해 가장 관대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지만 이제는 인종문제 때문에 생겨나는 부작용으로 여러가지 중대 결정들을 하고 있다. 프랑스 선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었던 사르코지의 당선 역시 인종에 문제에 대해 너그러운 좌파정권에 대한 프랑스인의 경각심이 너무나 과해서 일어났던 선거반란이었다.

몇년 전 미녀 스타 샤라포바의 '옐로 몽키' 발언에 한국의 개그맨들은 좋아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 있는 우리 피부보다 약간 더 검은 동남아 친구들을 기피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과거에는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양키 고 홈' 을 외치던 때도 있었다. 

우리는 외국인에 대해 친절하다. 이 문장은 옳지 않다. 
우리는 서양인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친절한 것이다. 

외국의 극우파 청년들은 자기보다 피부등급이 낮다고(?) 이민족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우리의 선량한 할아버지들은 성조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른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이 같은 성조기를 들고 있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외지에 나가 아무런 잘못 없이 폭행을 당한 한국 유학생이 부디 완쾌되어 일어나길 바란다. 
세상을 바라보며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평등과 차별은 반대말 처럼 보이지만 평등한 차별과 차별적 평등을 일관되게 적용시켜야 세상에 대한
평등한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의 KKK단, 이들이 들고 있는 십자가와 성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