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까칠한

[비둘기에게] 평화의 상징에서 위험조류로






 
동물은 본능에 의존하기에 그들에게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기는 힘들다.
돼지가 많이 먹는다고 탐욕스러운 동물이라 비난하여 돼지가 조금 먹는다면 돼지는 이미 돼지가 아닌 것이다.

구약 창세기에서 방주의 노아에게 올리브 입을 물고 돌아와 평화의 상징이 되었던 비둘기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비둘기는 이제 시인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 절정의 시어가 되기에도 적합치 않을 것 같다.

실제 비둘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회색빛 도시의 훼방꾼이었다. 
까치가 집을 지으면 으레 떼거지로 몰려가 집을 빼앗고 무심코 몇마리 비둘기에게 던져준 새우깡이 빌미가 되어 온동네 비둘기가 다 날라와 새우깡 주던 꼬마가 울며 도망가는 장면도 목겼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더 심각해 진 것 같다. 
이제 비둘기에 먹이를 주면 안된다고 한다. 
굶겨서라도 개체수 조정을 하겠다는 결단인 것이다.


[해외 브랜드 도브비누와 도브 초콜렛-이들 회사는 한국에서 'DOVE'가 비둘기가 아니길 바랄 것이다]


동물인 비둘기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
그냥 본능대로 먹이 구하러 다니고, 공중(?)화장실의 배설시스템으로는 낙하지점이 들판이던  문화재이던 본능에 충실했는데,
비둘기의 배설물이 산화작용이 커서 원각사지 석탑은 아예 유리관 안에 들어가 있단다. 다 비둘기 때문이고
이제 비둘기 무서워 문화재들에게 옷을 해 입혀야 한단다. 

미운 털 박힌 놈은 무엇을 해도 밉다고 
이제 각종 병균과 유해 곤충의 서식지로 비둘기의 몸통이 지목되고 
비둘기 한번 푸다닥 날개짓에 병충해가 옮겨진단다.


변하는 것은 인간의 기준일뿐 동물은 순수하다.

비둘기가 이 회색빛의 도시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잘 먹고 잘 살며 '평화'라는 인간이 만든 잣대 위에 농락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올림픽 때는 날려보낼 비둘기가  모자른다고 비둘기 구하러 다니던 인간들이 이제는 비둘기가 넘쳐난다고 개체수를 조정한다니, 이 지구별에 가장 괴팍하고 공존할 줄 모르는 것은 우리 인간인 것 같다. 


이런 날에는 시인과 촌장의 '비둘기에게' 를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비둘기에게 

그대는 나의 깊은 어둠을 흔들어 깨워
밝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줘

그대는 나의 짙은 슬픔을 흔들어 깨워
환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줘
부탁해 부탁해

어린 횃불이 되고픈 나를
마음속의 고향에서 잠자는 나를
천진난만하게 사는 나를
맥빠진 눈을 가진 나를

부탁해. 부탁해. 부탁해. 부탁해...


[이제 비둘기에게 이런 식의 부탁은 하지 말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