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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대선이 끝나고 TV를 끊다, 그리고 발견한 사실

솔직히 아직도 허덕이고 있습니다. 오늘 배우 유아인이 트위터에 올린 소신 글이 화제가 되더군요. 누가 1독을 권유하길래 읽어 보았지만 잘쓴 글 같기는 하지만 저에게 도움은 되지 않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튼튼한 젊은이에게 삶의 고통은 지나가는 바람 정도 느껴질 수 있지만 40대의 나이에서 바라보는 '고통'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손바닥 꾹> <추천 꾹>




[출처 : 유아인씨 트위터 내용]




유아인의 말은 '이민 간다고 떼쓰지 말고 희망을 가져라' '진보는 반성하고 진보적으로 진보해라' 그런 말인 것 같은데 '희망'의 근거가 젊음의 패기에서 나온다면 별로 동의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왜냐구요 시간은 흐르고 젊음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솔직하게 '진보'적이었나요? 그냥 상식적인 공약을 한 것에 불과한데 책임은 진보의 무능이라는 결론은 아직 사회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갯기라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관련기사)


우리나라 미디어 환경이 저런 젊은 배우의 글 하나에 요동을 치는 것 보면 무게도 없고 깊이도 날려버린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갖쳐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볍다 못해 천박하기까지 했던 미디어의 농간으로 주객이 전도되는 대선 결과 또한 나온 것이구요. 






[출처 : 유아인씨 두번째 트위터  ]




2012/12/24 - [까칠한] - 대선 패배, 고통스럽지만 상처로 남기지 말자



▲ 대선이 끝나고 TV를 끊다


대선이 끝난 이후 제 생활에 한가지 변화가 왔습니다. TV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TV가 바보상자라서 안 보는게 아니라 채널 돌리기가 무서워서 입니다.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옛 여자 친구의 모습을 보았을 때 가슴이 쩡하고 놀라는 것처럼 TV를 켜면 미쳐 놀라버릴 것 같아 집에 있어도 TV를 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TV를 보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점심 먹으로 식당이라도 갈라치면 대형 화면에 나오는 것은 온통 새 대통령의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모습을 담은 한편의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동적으로 쳐다보는 식당 아줌마의 그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면서 차마 TV를 꺼달라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햇습니다. 


새로운 박근혜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냐구요? 아니요! 국민이 뽑았는데 제가 왜 그녀를 부정하겠습니까?. 제가 역겨운 것은 그들 둘러쌓고 있는 사람들과 충성 경쟁이라도 하듯 마구 질러내는 언론의 천박함이 싫은 것입니다.  




[출처 : 아이엠피터]



▲ 미디어 블로거가 TV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는 또하나 생겼습니다. 미디어 관련 포스팅을 위주로 하는 블로그인데 제 자아가 TV를 보지 않으려하니 당췌 소재를 찾아내기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터넷에 의지하여 한편의 포스팅을 준비하기란 절름발이 글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공중파 TV 뉴스가 전하는 세상의 소식, 종편과 케이블에서 전하는 시사보도를 보면서 저들이 어떻게 세상을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지 신랄하게 비판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하루종일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죽였죠. 시간의 간극을 넓혀서 기억의 쇄락을 얻어 제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잊혀지겠지. 그리고 일상처럼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내일의 태양을 보면서 열심히 어디론가 달려가겠지 말입니다. 




▲ 인생은 해석이 불가능하다?


첫번째 영화는 인간의 감정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랑하면 안되는데 사랑하게 되어 결국에 '파국'(Demage)으로 치닫는 심각한 영화였습니다. 이런 영화들의 특징은 유럽 도시의 우울한 색채와 분위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생은 해석이 불가능하다'



다음 영화는 코미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 역시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영화인데 여자는 '언제나 뭔가 다른 무엇'(anything else)을 찾지만 여기에 대해 남자의 일편단심은 상처로 일관한다는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뭔가 다른 무엇인가'가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를 따끔하게 꼬집는 우디 알렌 특유의 재치있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놀라왔던 것은 이 영화에서도 역시 앞 전 영화와 똑같은 대사가 대미를 장식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몇가지나 되는가?' 




[우디알렌의 애니씽 엘스 영화 포스터]




상식적인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비상식적인 사람들은 인과관계보다는 기분과 미신을 추종하지요. 이것을 진보와 보수로 구분해도 비슷합니다. 진보는 논리를 강조하고 보수는 감정에 호소합니다. (물론 엄격한 보수는 스스로를 더 현실적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대선이 끝나고도 며칠이 흘렀건만 멘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런 사람에게 '희망을 가져라' '바쁜 꿀벌 이야기'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 멘붕에 빠진 이유 : 대선에서 패배에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런데 두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면서 내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왜 원인과 결과에 따라 꼭 설명이 되어져야만 했던 것이지 라는 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내가 해석하지 않아도 흘러가고 내가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나를 지금까지 있게 하였습니다. 




[가장 경계해야할 멘붕의 진화 과정을 잘 표현한 트위터 글 출처 : 박대용 기자]




이런 식의 생각은 열렬했던 지식인이 어떻게 무기력한 감성주의자로 변해가는 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과정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애니씽 엘스의 마지막 대사 '우리 인생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몇가지나 되는가?' 를 상기하면서 나한테 '여백의 시간'을 주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꼭 지금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그냥 저는 원래 저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TV 리모콘을 두려워하지 않고, 길가다 아직도 철거하지 않은 선거 벽보를 외면하지도 않고, 인터넷 포털에 쏟아지는 민영화의 유령들을 회피하지도 않고 다시 세상을 쳐다봐도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이해 안되는 사실들 무덤까지 가져갈 수도 있고, 세월 어느켠에선가 '아 그때 그 일은 이런거였구나' 불현듯 의미를 알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 내가 나 아닌 것처럼 살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정말로 자기 자신처럼 살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