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논할 때 인간에게는 표현의 한계가 있다. 아름답다, 맛있다, 새콤하다 등의 표현법을 가지고 우리는 일상에서 무리 없이 대화를 나누고 서로가 소통하며 산다. 그런데 때로는 '실제 감각'과 '감각 표현'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괴리 때문에 사람이 대상에 대해 온전히 안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온전히 아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앎'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않기에 생기는 오류일 수도 있다. 

   







그래서 먼저 앎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앎’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없는 한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본질’과 상관없는 ‘현상’적인 이야기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눈 앞에 사과 한 개가 놓여있다고 치자. 한국에 사는 김 씨는 사과가 무척 맛있다며 맛을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 열대밀림에서 온 타잔에게 사과의 맛은 ‘시큼하고 달콤하다’며 맛을 설명한다. 이에 대하여 타잔은 사과 맛은 ‘시큼하고 달콤한 맛’을 자기도 잘 안다며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인색한 김 씨는 자기만 먹고 결국 지켜만 보는 타잔에게 사과 맛을 보여주진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타잔은 동물 친구들에게 '사과 맛' 설명하는 데 여념이 없다. 열대밀림의 바나나와는 차원이 다른 맛으로 ‘시큼하고 달콤하다’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다. 어떤 맛일까? 동물 친구들의 입 속에는 이미 군침이 가득 돈다.


그러나 타잔의 설레발을 못마땅하게 듣고 있던 원숭이가 타잔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너는 사과를 먹어보았니?”

“........”


타잔은 자기가 들었던 사과 맛 설명을 듣고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니 친구들 역시 타잔이 사과 맛을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가 보기에 ‘맛“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써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타잔은 사과 맛을 아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몇 년 후에 타잔의 초대를 받고 아프리카를 찾아 온 김 씨는 아프리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사과’ 이야기를 시작한다. 타잔과 김 씨는 오랜 시간 사과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야기 했지만 결코 본질에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것은 그 둘의 대화는 ‘현상’에 대한 대화이지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앎에 대한 논의의 시작




이와 같은 ‘앎’에 대한 문제, 그리고 어떻게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이냐의 논의는 매우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교과 과정 또는 상식으로 잘 알려진 플라톤의 [국가] ‘동굴의 비유’에서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그림자에 비친 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 즐기는 대화는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상'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사과를 먹어보지 못한 타잔처럼 우리 역시 본질은 경험하지 못한 채, 현상만을 논하며 모든 것을 잘 안다고 착각하며 사는 삶은 아닐까? 여기에 대해 혹시나 고민이 든다면 '철학'을 만나야할 때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와같은 앎, 인식, 존재론에 대한 수 많은 생각을 쌓아올렸지만 여기서 답변을 찾는 방법은 그들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찾아야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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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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