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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정치에 무관심 하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정치에 무관심 하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늘의 블로그 제목을 보고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참 훌륭한 문제제기라고 무릎을 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답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나라 대기업과 대형 교회에 가면 무언의 규율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대기업에서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논쟁은 하지 않는다'이고 대형교회에서는 ''정치' 이야기는 교인끼리 나누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이것의 이유는 내부적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주제이며 한편으로는 '답'을 내릴 수 없는 난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추천 꾹><손바닥 꾹>





[출처 5분사탐 EBS]




▲ 대기업과 대형교회에서 해서는 안되는 이야기 "정치"

대기업이야 이익 추구가 목적인 회사이기 때문에 이와같은 불문율이 나름대로 이해가 가지만 대형교회에서 '정치' 이야기 금지는 조금은 이상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교회가 사회 문제 곧 정치에 관해서 무관심하거나 등을 돌린다면 그들이 말하는 세상의 구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오리무중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정치 혐오 또는 폄하의 생각이 담겨져 있는 듯 합니다. 정치인은 거짓말장이고 그들이 하는 짓거리는 인간 이하이기 때문에 거룩한 종교인은 정치 근처에도 범접하지 말라는 순수지대를 설정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형교회에서는 특히나 정치 혐오가 심하여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이 거룩한 종교 활동과 동일 시 되어온 것 같습니다. 





[소신을 가지고 용기있게 말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




▲ 종교가 만들어낸 거룩한 정치적 무관심? 

존경받는 목사님, 사람을 구원한다는 종교가 유독 한국 정치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닌 훌륭한 종교의 역할처럼 인식되어져 온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커다란 축을 담당해왔던 종교가 정치적 무관심을 미덕으로 삼으니 일반인들의 정치 무관심 역시 비난 받을 일 또는 부끄러운 일로 생각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그런 사람들이 매우 거룩하고 고매하며 순수한 사람인 것처럼 순수지대를 형성하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학식 있고 교양 있으며 재력을 가진 사람들, 상당수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천박한 것이라고 여기며 자신들만의 고매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광장에 나가 정치 구호를 외치고 거리에 촛불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은 너무 어리거나 생각이 얇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철이 덜 들었거나 불평분자들이 언제나 하는 세상에 대한 불만이라고 평가 절하해 버립니다. 한마디로 값어치 없는 일로 시간을 축내며 쓸데없는 짓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치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정치가 정말로 하찮은 것일까요?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순간 우리의 인격도 정치인의 그것처럼 '거짓'으로 가득차게 되나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우리 내적 불만을 사회적으로 분출하는 잘못된 인격 표현의 방식일까요? 


여기서 다시 오늘 블로그 제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하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Peut-on agir moralement sans s'intéresser à la politique ?) 는 제가 만든 글 제목이 아닙니다. 이것은 2013년 프랑스 대학입시 논술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철학문제 였습니다. (번역 : 파리13구)





[시위를 벌이고 있는 프랑스 고등학생들 , 너무나 자유스럽고 당연해 보인다. 출처 무터킨더님 블로그]





▲ 프랑스 고등학생 대상 논술 시험 바칼로레아

프랑스는 대학을 진학하려는 어린 고등학생들에게 정치적 무관심과 도덕적 행동에 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를 천박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프랑스의 지성사회는 이것이 공화국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집고넘어가야할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논술이 그러하듯이 이 주제는 '가능하다' '가능하지 못하다'의 가부를 따지는 것보다는 사고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핵심인 듯 합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생각의 힘이 인간을 이롭게 할 것이라는 깊은 철학이 담겨있는 교육인 것입니다. 


논리적 사고와 상식에 기반한 프랑스 고등학생들 상당수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이 도덕적 행동을 하기 어렵다고 추론해 나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공화국은 국민 합의에 의한 '약속'을 기반한 사회이고 이것을 유지 발전 시키는 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올바르게 되려면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치 시스템이 사람이 아닌 기계가 한다면 정치에 무관심해도 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기계는 탐욕에 눈이 멀거나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거나 타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는 사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이 해야 합니다. 이들은 삼권분립에 의해서 서로 감시되어져야 하고 언론의 비판 기능이 더해져서 정도를 걷게 만듭니다. 


그래서 국민은 언제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감시하고 투표를 통해 심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도덕적 삶이 영위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시험 답안지 였다면 칸트의 순수이성에 관한 도덕의 개념부터 설명해 나갔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공동의 선에 해악을 끼치 않으면 도덕적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기 눈을 스스로 다치게 하여 한쪽 눈을 실명한 고호를 가르켜 비도덕적이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개인사가 남을 향하지 않을 때는 도덕적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살을 할 경우는 도덕적 문제에 직면합니다. 왜냐하면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와 친구들이 입게될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것 때문에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살에 관하여 부모와 친인척이 없다면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단지 쓸쓸한 죽음으로만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자살을 금지한 기독교 신자였다면 도덕이 아니라 율법을 어긴 '죄인'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시국선언하는 한국의 고등학생들, 출처 경향신문]





▲ 도덕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 정치는 사회적 합의

도덕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됩니다. 그리고 정치 또한 타자들의 연합, 공동의 합의를 바탕으로 지탱되는 것입니다. 간혹 가다보면 혼자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줄이 긴 매표소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중간에 끼어드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뒷사람에게만 양해를 얻고 새치기를 한다면 뒤에서 양보해 준 사람은 남에게 선의를 베푼 도덕군자일 수 있지만 맨 뒷편 사람들은 그의 선행 때문에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중간에 배려를 통한 새치기가 일반화 된다면 착한척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공공의 선이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배려나 양보를 바람직한 인간 규범(도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합의에 의해서 규정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는 법을 만들며 갈고 닦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에 헤게모니에 따라 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하여도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부자 감세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부자 증세를 통해서 세상의 균형을 맞춥니다. 


서민이 투표장에 가서는 보수 정권을 찍고서는 집에 날라온 세금 명세서 금액이 너무 과도하다고 납부를 거부하면 도적적인 비난과 함께 '법'의 저촉을 받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 정치와 무관한 삶은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주 모두가 정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정치에 무관심하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다고요? 그것은 산 속에 들어가서 혼자 농사짓고 밭 갈며 살면 가능할 뿐 현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의하길 '정치적 동물'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 보수의 탈을 쓰고 거룩한 침묵으로 위장한 종교

그런데 우리사회는 여전히 정치적 무관심이 고상하고 점잖은 삶의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듯 합니다. 이것의 책임은 특히 개신교의 보수성에 기인합니다. 교회는 불우한 이웃을 돕고 남에게 봉사한다는 표면적 선행 외에는 세상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독재와 억압이 빈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가 사회에 참여하여 이것이 잘못되었다 선언한 적이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현재에 와서도 작년 대선에서 이루어진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서 거의 모든 학계와 종교계가 시국선언으로 잘못된 세상의 경종을 울리고 있는데 개신교 특히 대형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침묵과 외면이 거룩하고 훌륭한 종교생활이라고 가르치는 잘못된 목사들의 일그러진 행동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회는 고등학생들에게 도덕적 생활자의 정치 참여에 대한 성찰과 답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민주 공화국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며 의무이기 때문에 제대로된 사회 의식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개신교도 시국선언에 동참했지만 정작 교인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교회는 침묵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 강요된 정치 무관심은 악의적인 정치 개입

그리고 대형교회가 겉으로는 정치에 무관심한 척 하면서 교인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강요하는 것은 실제로 엄청난 정치 개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상당수 청년들은 북한의 헐벗고 굶주리는 실상만 알았지 작년 대선에서 짓밟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회복되어야 북한도 온전히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개신교는 북한의 실상에 대해서는 측은지심을 보내고 현재 우리 눈 앞에 보이는 '불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목사 시험에 프랑스 바칼로레아 논술 문제를 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무관심하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문제에 대한 성찰 없이 인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물구나무로 세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민주주의가 유린되는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도덕적 생활은 커녕 올바른 종교도 없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명언으로 끝내겠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약한자들의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자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