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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제주 4.3 사건, 평화공원에서 이승만을 만나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제주4.3사건 등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모슬포 경찰서와 성산포 경찰서를 신설했고,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켰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입니다. 그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또한 개신교도 였다는 동질감으로, 공산주의와 맞서싸웠다는 사명감으로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주특별자치시 4.3 평화공원에 가면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4.3 사건에 대한 지시 사항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위에서 "가혹하게 탄압하라"의 대상에는 결국 일반 시민도 포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4.3 사건으로 사망한 자가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10세 이하 어린이가 5.6%, 61세 노인이 6.2%를 차지합니다. 어린아이와 60세 넘은 노인이 국가 권력에 얼마나 위협이 되었기에 무참히 죽여야만 했을까요 


이승만은 빨갱이를 처단하라고 외쳤겠지만 실제 제주에 도착한 진압군은 일반 시민도 무차별적으로 사살했고 수 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4.3 사건인 것입니다. 



'제주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돌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문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승만은 국민을 위하기 보다 권력에 대한 탐욕이 앞섰던 대통령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만약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었다면 서북청년단과 같은 광기 집단에게 힘을 실어주며 제주도로 내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기록과 회고 역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극우청년단 '서청' 들어오다


'빨갱이 샤냥'을 구실로 테러


제주도가 '붉은 섬'으로 지목되면서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숙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48년 초에는 서청 단원이 76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Red-Hunt)'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시켰고, 이는 4.3사건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고 했다. 





이승만은 친히 대통령의 신분으로 서북청년회 총회에 까지 참석하여 4.3사건을 언급하며 그들의 광기에 불을 질렀습니다.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해 

'제주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사상이 투철한 여러분들이 나서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제주도에 와 경찰과 군인이 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한 겁니다.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만 앞세워 현지 사정도 모르는 서청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박형요(서북청년회 출신 경찰)의 증언







빨갱이와 일반 시민을 구분 못하는 한심한 대통령이 부채질을 하고 혈기 넘치는 과격 청년들이 애국과 극우를 헛갈려하며 제주4.3 사건의 살육은 진행된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상식적이었다면 이승만과 같은 이는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존경이 아니라 양민 학살의 책임을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그러진 현실은 이승만을 개신교와 자유민주주의 수호한 꽤 괜찮은 대통령으로 기억하려 합니다. 





하지만 제주도 4.3평화공원에 가면 모든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 증거들을 보고서도 '이승만'에게 '존경'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손바닥으로 진실을 가리며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4월 3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으면 합니다. 예의바른 양심만으로는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당시 제주 경찰서에 하달한 '대통령 이승만' 관인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