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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전기 절약과 한미 FTA 할아버지


오늘 회사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두분 할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좀 이른 시간에 간 식당이라 본의 아니게 상대방의 대화 내용이 다 들렸습니다. 

두분 할아버지는 서로를 이사장이라고 호칭하셨습니다. 70은 훌쩍 넘기신 나이로 보였고, 거동도 약간 불편하셨습니다. 두분은 들어오시자 마자 메뉴를 가지고 식당 주인과 밀당을 하셨습니다. 동태탕 집이었는데 동태탕은 6000원 내장탕은 7000원이었습니다. 한 노인분이 어떤 게 좋겠냐는 질문에 식당 사장님은 꽤 양심적인 추천을 하셨습니다. 1,000원 저렴한 동태탕을 이번에 드셔 보시고 괜찮으시면 다음에 오셔서 내장탕을 드셔보시라는 권유였습니다. 

무조건 비싼 것을 권하지 않고 나름 합리적인 추천을 한 식당 사장님이 새롭게 보이더군요. 그런데 두분 할아버지는 서로 실랑이를 하시더니 결국 주인의 추천과는 다르게 '1000원 비싼 내장탕이 뭐가 다르더라도 다를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시면서 주문 받은 직원이 다시한번 주방에 소리를 지르게 하셨습니다.


"동태탕 2개 취소, 내장탕으로"


잠잠한 식당 분위기였고, 이내 식당의 조명에 대해 화제가 바뀌었습니다. 날이 환하니 실내 조명을 아끼자는 주장, 식당 주인은 낮이라 밝기는 해도 불을 끄면 어둡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사코 만류를 하셨습니다. 듣다가 두분 할아버지는 절충안을 제시했습니다. 형광등 반만 끄자고, 식당 주인이 나름 웟어른을 공경하는 분이었더랬습니다. 못 이기는 척 하더니 천장에 6개 달린 조명 중에 3개는 꺼버렸습니다. 

이내 만족한 노인분들은 거침없이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아 OOO씨가 북한에 전기를 꽁짜로 줘버렸어요" ....(약간의 반응을 살피더니)
"그런 사람은 매국노 아닙니까? 매국노"


이내 속에 있던 누군가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남의 장사 하는 집에 조명이 밝다 전기를 아끼자는 의도는 결국 북한에 전기를 공짜로 공급하겠다던 한 사람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논리를 훌쩍 뛰어 넘어 한미 FTA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철지난 주장을 하시더군요

친한 할아버지였으면 '이미 FTA는 통과되었어요 할아버지 소원대로 되셨답니다' 이렇게 답해 드렸어야 하는데 저는 애꾿은 동태 내장만 파먹고 있었습니다. 

착한 식당 주인은 거기에 대해서는 맞장구를 안 치시더군요. 미국 대형 식당 프렌차이즈가 들어와 근처 샐러리맨의 점심 마져도 자신들의 손아귀에 담아 버린다면 가뜩이나 원가 상승으로 허덕이는 중소자영업자는 또다른 출혈 경쟁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내 주문했던 내장탕이 나왔고 할아버지는 2% 부족했던 대화를 마무리짓고 식사에 전념하셨습니다.

말씀도 어눌하셨고 식사 하시는 모습도 편치 않았던 것으로 보아 썩 건강치는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내 할아버지가 왜 FTA가 선한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해졌고, 세속적이지만 할아버지가 한미 FTA를 견뎌낼 만큼의 충분한 돈이 있으신 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인이 그런 무한한 긍정의 신념을 가진 무엇인가가 결국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기 보다는 자신을 비참하고 힘들게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친한 분이 아니라 말씀을 드리진 못했지만,

"할아버지! 그렇게 바라시는 한미 FTA가 썰물처럼 영향을 미치면, 할아버지 병환이 나셨을 때 자식한테 손 안 벌리고, 본인 돈으로 병원 가시기 힘들어져요. 할아버지의 애국심이 본인의 병보다 더 높은 지고지순의 가치라면 괜찮겠지만
할아버지! 그것은 젊었을 때 건강하고 힘이 넘쳐날 때 이야기고, 나이 들고, 약하실 때, 아픈 몸에 병원비가 부담스러워, 원 없이 치료 한번 못 받아보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 비참할 거 같아요"


머리 속으로 나레이션이 돌아가더군요. 

"그리고 할아버지 친구들을 생각하셔야죠? 할아버지야 내장탕 7000원을 지불할 충분한 여유가 있을지 몰라도 700원 짜리 라면도 버거운 주변분들이 계셔요. 그런 분들에게 병원은 그림의 떡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이런 생각이 들며, 며칠 전에 이빨 2개를 뽑으시고, 이제는 본인의 진짜 치아가 달랑 1개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씀을 담담하게 하시며, 고통스러운 듯 식사를 하시던 우리 친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내장탕 맛 정말 없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