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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한

블로거가 글을 쓰는 이유 -폭력에 대한 단상-

제주도에 내려왔습니다. 잠시 멈추었던 '길위에서의 생각'을 다시금 열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일에 치여 돌아보지 못했고, 마음을 잡지 못해 혼란스럽기만 했던 서울에서의 '일상'을 뒤로하고 잠시나마 진정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도시 생활의 고민은 막연하지만 '행복이란 무엇인가?' 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행복이 내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 것인지의 문제였지요. 행복이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나를 가꾸는 일에 몰두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 행복이 나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저는 행복을 찾아 헤매여야겠지요. 


궁극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일상에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아빠, 엄마의 모습에서도, 산 속에 은둔하며 구도의 길을 걷는 은수자에게서도 엿볼 수 있으며, 이 둘 사이에는 종이 한장 차이의 여백 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행복의 강열함은 객관식 답안지로 순위를 매길 수도 없으며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다면 알 수 없는 경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행복에 대한 절실함을 막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폭력'인 것 같습니다. 정신의 폭력, 육체의 폭력, 사회 구조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은 인간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막는 것을 물론이고, 행복 자체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듭니다. 


저의 블로그 글쓰기는 일종의 폭력에 대한 고찰입니다.. 과거부터 지켜보아 왔고, 앞으로도 감시해야할 폭력의 구조에 대해 예전에 섰던 글을 올리며, 제주도에서의 포스팅을 대신할까 합니다. 




제목은 '폭력에 대한 단상입니다' 


내가 있는 부대는 산 속에 숨어 있다. 한 열대명 근무하는 곳이라 어떻게 보면 별동부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 나의 위치는 대빵의 자리이다. 듣기 좋아 대빵이지 사실 옛날로 치면 귀향살이 온거나 다름없다. 


그림이 잘 떠오르지 않는 미필자 및 여인들을 위해 부연 설명하자면 영화 지중해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렇다고 영화처럼 이곳이 낭만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냥 생활이 영화에 나오는 군인들처럼 당나라 같다는 것이지 나는 항상 이곳의 탈출을 꿈꾼다. 


임무상, 이건 진짜로 임무상의 일이었다. 아이들(=군인,병장상병일병이병)의 일기장을 검사한 적이 있는데 이곳이 지옥 같다고 표현하는 놈도 있었고 상급자인 나는 지옥의 염라대왕으로 묘사되곤 했다.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경험이 아니다. 나는 그날 내가 정말로 나쁜 놈인지 하루종일 고민했다. 너무 머리가 아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아이들과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동료들은 위문까지와서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정말로 아이들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젊은 나이에 이런 곳에서 있다는 것만도 힘든데 나까지 스트레스 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끝났다. 


나는 더 이상 그 아이들의 형이며 선배 같은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나는 아이들을 보며 동생이며 학교 후배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이들의 마음에는 난 그냥 한명의 상급자일 뿐이었다. 서로 마음의 문을 닫고 영악해지는 것 같다. 나도 더 이상 이런 일로 신경쓰는 내 자신이 싫고 그들을 남이라 생각하니 아주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그런데서도 좀 눈에 띠는 이상한 녀석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는데 나 역시 고백하자면 그 아이가 마음에 안든건 사실이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문제가 많았던 아이고, 자신이 신흥귀족이라고 자랑하는 그 아이의 정신상태가 좀 의아하긴 했다. 나는 불쌍해서 잘 해주려 했는데 나의 동정을 눈치라도 챘나? 귀족의 명예가 손상이라도 입었나보다.


이 정도면 대강 내가 있는 곳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군인들하는 거와 거의 똑같다. 별로 색다르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일이다.






우리 부대에는 개가 한마리 있다. 이번 여름에 가축실태 조사에서 군견이냐 식용이냐 라는 선택 항목이 있었는데, 판단하느라고 많이 애먹었다. 저 개의 견생을 위해서라면 올여름 사람들의 배를 든든하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난 지금 저 개의 할머니서부터 보아왔다. 난 그 할머니 개를 보며 한편의 견생드라마를 보는 거와 같았다. 한때 군 실력자의 애견으로서, 조리된 고기가 아니면 거들떠 보지도 않던 자리에서 그 실력자가 다른 곳으로 떠난 후, 이 곳으로 보내져 그때부터 있었던 갖가지 박해와 설움의 세월들…. 그리고 동네 똥개들과의 삼각관계 등등… 참으로 한 많은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보고야 말았다. 그 개가 이 동네 온갖 똥개들을 아우르고 그들의 우두머리로 우뚝선 모습을..  내가 부대 펜스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정체 모를 똥개 집단이 차도를 따라 행진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앞에 대장개의 모습이 눈에 많이 익어서 자세히 쳐다보니 바로 우리 개였다. 그때의 놀라움와 감동… 견생에서 무엇이 행복이고 불행인지…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 할머니의 손자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곰이라 불리는 개이다. 그 개의 이름은 곰이다. 곰이라고해서 팬다곰이나 ‘푸우’ 같은 귀여운 곰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냥 태어났을 때 모든 사람이 그 이상하게 생긴 새끼를 보고 곰 같은 놈이라고 부른게 아무도 정하지 않았는데 굳어져 버렸다. 


곰이 태어날 때 형제가 세마리 더 있었는데 두마리는 팔자고쳐 실력자의 손에 넘어가고 한마리는 길에서 횡사했다. 실력자들이 찾아와 강아지 품평회 시간이 되면 새끼들은 계급 상승을 노리며 자신의 자태를 뽐냈지만 우리 곰은 항상 예선 탈락이었다. 일단 새끼를 데리러 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곰은 쳐다도 안 본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들의 식견이 훌륭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 곰은 내가 옷 갈아입고 저녁에 나가면 날 보고도 짖는다. 그리고 우리부대에 가끔 들리는 개장수 아저씨에게 꼬리를 흔드는 경우도 있다. 곰의 아버지를 훔쳐갔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그 아저씨가 무섭지도 않은가 보다. 한마디로 우리 곰의 지적사항은 적군과 아군을 구분 못하는데 있다. 그리고 짧은 메모리, 하루 이상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곰의 이상한 모습은 동네 똥개들도 알아보는 것 같다. 그 할머니가 이룩했던 천하통일의 위업이 손자대에 와서 산산히 부서지는 것 같다. 요즘 가끔 상태가 이상해져 있는 것 같아 관찰해 보면 이 놈이 이제 나이들었다고 발정상태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앞집에 그 털빠진 흉측한 암캐도 우리 곰하고는 놀려하지 않는다. 


곰의 할머니가 이곳 수캐들의 사랑을 독차지해 서로 물고 물리는 ‘개판’이 연출되었던(확인은 불가능하지만 할머니개가 새끼를 배었을 때 그 아버지 개라는 추측을 샀던 개는 상대편 개에게 물려죽었다) 거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곰은 맨날 혼자 논다. 큰 마음 먹고 곰 소원성취나 시켜줄까 생각도 해보지만 곰의 씨를 받고 태어나는 새끼들의 불행함을 생각해 보면 고개를 흔들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곰에게 성생활의 자결원칙을 부여했다. 자기가 알아서 하라고……




곰은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장난감이다. 갖가지 구타와 가혹행위들, 한마디로 도그마루타이다. 생각해보면 곰이 머리 상태가 이상한 것도 어려서부터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때리는 것에 식상한 아이들은 개에겐 아주 힘든 두발로 뛰어다니기, 공중회전 스무바퀴, 목 조르기, 쇠사슬로 온몸 묶기(내가 볼 때 이건마마, 호환보다 무섭다던 그 빨간 테이프의 영향인 듯) 등등 항상 우리부대는 곰의 비명에 조용한 날이 없다. 


그런데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심한 가혹 행위는 곰 귀에 매미 집어넣기, 곰이 가장 싫어하는 사슴벌레로 코 물기, 그리고 얼마전 내가 무심코 던져준 강력 고무줄로 아이들이 곰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입을 두겹세겹 묶어둔 체 까먹고 하루밤을 보내, 다음 날 입이 부르트고 부어서 곰이 졸지에 불독으로 변화 것 등이다. 그날은 나도 좀 분노하여서 앞으로 한달간 곰에게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아마 그 한달이 지나면 곰에겐 새로운 종류의 가혹행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개를 좋아한다. 난 지나가다 개를 보면 유혹의 눈길을 보내며 아드레날린의 요동을 느낀다.누군가가 이상사회의 모습을 아침에는 낚시하고, 오후에는 일터에 나가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플라톤을 읽은 것이라고 묘사했던데, 내가 그리는 이상사회는 아침에는 자고 싶을 때까지 자고 문열고 나가면 나의 애견이 쭐레쭐레 내 옆으로 다가오면 같이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함을 상상하곤 한다. 


하여튼 난 개가 좋다. 그런데 나의 위치로 보아 우리 곰이 탄압당하는 것에 대해 나도 간접적으로 가해자이며 책임자이다. 개를 좋아한다면서 개가 잔혹행위 당하는 것에 무책임한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면 나도 언제부터인가 곰을 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도 한번 곰을 톡하고 때린적이 있다. 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땐 좀 마음이 아팠다. 사실 이유가 있어서 때린게 아니라 그냥 심심해서 한번 때려 보았다. 내 마음 속에 있던 폭력성의 발로라고나 할까? 장난이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다음날 한번 더 때리게 되었다. 어제보다는 좀 더 강도가 강하게, 역시 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 다음날부터는 호기심, 자존심, 스트레스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하면서 때리기 시작했다. 곰이 얼만큼의 세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날이 갈수록 나의 폭력성은 강도를 더해가고 펀치의 양도 많아졌다. 이제는 손이 아니라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켕’ 외마디 비명으로 일관하던 곰이 이제는 ‘케켕켕켕’ 아주 죽겠단다.


변화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니 변화가 아니라 내 속에 숨겨져 있던 폭력성이 고개를 드는 것 같다. 내가 평소에 그렇게 폭력적이었던가? 나 자신도 놀라게 된다. 


이제는 죄책감도 어떠한 의식도 없다. 곰이 가엾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생활에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묘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곰이 나에게 맞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마치 지금까지의 글이 나는 어떻게 해서 새디스트가 되었나 같지만 한번 새디스트는 영원한 새디스트가 아닌가? 나는 다행이 수렁에서 빠져 나왔다. 요즘은 곰을 때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곰이 아이들에게 맞을 때와 나의 경험을 토대로 느끼는 아쉬움은 곰의 무저항 정신이다. 곰은 절대로 나를 비롯해 우리 아이들dl 때린다고 물거나 짖지 않는다. 가끔 곰의 입을 벌리려다 이빨에 찍히는 경우는 있어도 물지는 않는다. 그것이 개의 천성일까? 나는 좀 답답하다. 곰이 물려고 덤비거나 으르렁거렸으면 좋으련만 곰은 아이들이 괴롭힐 때 너무나 무기력하다. 개는 한 주인만 섬긴다던데 우리는 열명이 넘는다 곰이 우리모두를 주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을텐데 왜 저럴까?


어떤 때는 정말로 곰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로 아이들이 괴롭힌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정신상태이기에 자신의 생명을 짓밟는 상대에 대해서도 이처럼 비굴하고 무기력할까? 사실 나의 폭력의 원인이 여기에 기인하기도 했다. 난 내가 곰을 괴롭히면 이 자식이 화를 내고 반항하길 바랬다. 그리고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난 그놈의 개가 한번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절대로 다시는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서 곰이 우리에게 반항하지 못한다고? 그건 아니다. 곰은 우리보다 더 몸짓크고 험상궂은 사람한테도 잘 으르렁 거린다. 그리고 곰의 할머니 개는 자기를 심하게 때린 사람이 나타나면 아주 멀리서부터 짖으며 반감을 표시했고 잡히지않는 한 맞지 않았다. 


개를 이해하려는 내가 이상스럽지만 곰이 이런식으로 아무런 반항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지켜줘도 곰은 아마 골병 들어서 먼저 죽을 것이다. 반항하지 못하는 생명의 대가는 냉혹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삶의 조건에서 반항이 없이는 행복이 없다는 주장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내 생일날 옆에서 누가 도서상품권을 선물로 주니까 후배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들고 있던 책에 오빠 변하지 말라며 한마디 쓰고 선물로 준 ‘반항의 의미와 무의미’라는 책에서의 주장이다. 


후배가 내 앞에 앉아서 크리스테바 책이 번역되었다면서 호들갑을 떨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한마디씩 이야기를 거들 때 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정말로 무식함을 실감하게 했고,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되는 군대에 있다고 해도 후배 앞에서 난감했었다. (난 아직도 이 여자가 누군지 잘 모른다) 



난 요즘 물리적으로 누구한테 맞지는 않지만 항상 자고 일어나면 나의 정신은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TV를 오래보고 있으면, 신문을 보고 있어도 뭔가가 나에게 거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 아니 사실은 가만히 있어도 그 폭력은 계속 행사된다. 그런데 나를 때리는 그 대상이 너무 막연하고 희미할 뿐이다. 그래서 나 또한 반항지 못하고 그래서 나도 요즘 행복하지 못하다. 아니 막연하고 희미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너무 거대하고 명백해서 내가 일부러 못 본척, 안 보이는 척 하는지 모르겠다. 


물리적이던지, 정신적이던지 어떠한 폭력에도 반항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하는 폭력이라면  그 목적이 성취되면 그 폭력은 끝나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우리의 삶에서 폭력이 멈추었던 적은 없다. 처음에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폭력도 목적을 이루고 난 후에는 유희라는 새로운 목적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유희가 목적인 폭력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피해자가 무기력할수록 강도와 기간은 더 늘어나게 된다.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폭력이 단순한 목적에 의한 폭력이 아니라 이제는 항시적이고 만연된 폭력에 가깝다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삶은 행복할 수가 없다. 


돈의 폭력, 언어의 폭력, 사랑의 폭력, 지식의 폭력, 문화의 폭력 

‘그래도 삶은 한번 살아볼 만한 거라고’


나에겐 지금 이 말마저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말이 정말로 폭력적인 것은 난 지금 아무것도 반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