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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음악을 구분짓는 편견에 대하여




예전에 아주 예전에

음악에 관련하여 조그마한 글 부탁을 받았던 적이 있다.

자유롭게 써달라고 했지만 분명한 색깔을 갖고 있는

곳이라 그리고 나 역시 그 색깔에 공유점이 있기에

쾌히 승낙을 하였었다.

 

한참 준비해 두었던 나의 자료와 글들을

찾아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곧 '정의'이며 ''

라는 편견에 빠지지 말자는 다짐을 여러 번 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과거의 열정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나를 돌아보니

나 역시 그 편견의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무리하게나마 내가 꺼려하는 음악도

다양하게 듣게 되었다.

 

거들먹 거린다고 생각했던 클라식 연주회를 찾았고

사치스러운 재즈공연과 철없는 펑크음악....

그리고 음악을 위한 음악이 아닌

다른 대상을 위해 제조된 음악의 형태들까지 접해보았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경계했던 '편견'이라는 것이 내가 가진

가장 큰 편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장르를 직접 접해 들어본 결과 사실 음악이라는 것은 그냥

그 자체로서 '음악'일 뿐 클라식이니 팝송이니 세미 클라식이니

이렇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오류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해서 내가 재즈나 클라식 애호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역시 예상했던대로

재즈나 펑크는 나에게는 아주 거부감 가는 그런 음악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하였다.

 

'세속성의 본질은 차별성이다.'라는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구분해나가는 그런 차별화의 과정이 사람을, 음악을, 그림을

세속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세상에 엘리트가 어디 있으며 수준 있는 클라식이

무엇이며 소더비 경매장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미술품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두가 고귀함으로 위장한 세속성의 극치일 뿐이다.

그런 구분 지어짐의 역겨움이

언제나 대중문화 속에 풍자되어진다는 것은 이 시대의 필연이다.

 

너와 나를 구분 짓는 경계

나와 너가 하나 되는 우리

 

다시 한번

 

세속성의 본질은 차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