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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설국열차, 봉준호의 괴물은 자본주의 시스템이었다

자본주의를 싫어한다고 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불온한 세력으로 취급받기 쉽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다고 하여 자본주의 자체를 찬양하고 다니는 사람 또한 많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차명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차명계좌가 불온한 돈의 출처가 되듯이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 한가지 지류일뿐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못한다. 




<추천 꾹><손바닥 꾹>







한참은 정치 후진국인 대한민국에서 계급 투쟁을 연상시키는 주제를 달가와 하거나 찬양받을 일은 없어보인다.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정치적 수준과 동일시 하려는 천박한 정치와 미디어는 복지국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음에도 선진 유럽 사회의 복지 모델을 구닥다리 취급하며 "무지와 몽매'로 국민을 현혹시키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이러한 가운데 한국사회에서 개봉을 하게 되었다. 싸이는 국제 가수가 되었고 한류는 국지적 유행이 아니라 세계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매우 이로운 점이다. 하지만 문화와 대중예술 만큼 정치 사회가 수준 높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독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과거 5년 후퇴의 후퇴를 거듭하여 정치의 수준은 거의 난장판과 다름없고 내전에 빠져있는 아프리카 국가를 비교한다 한들 실소의 웃음이 아니라 동감의 슬픔이 입가를 흐를 수 있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에게 과거 '살인의 추억'과 '괴물'과 같은 한국적 소재를 발굴하지 않고 계급 투쟁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주제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진부하고 '긍정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언론의 글이 버젓이 올라와 있다. 심지어는 설국열차가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팬들은 안중에 없이 만들어낸 배신의 작품이라고까지 악평을 늘어놓는 리뷰어도 있는 것이다. 


무식에는 약도 없다더니 세계진출 작품으로 해외에서 촬영하고 외국 배우까지 동원하여 만든 대작 앞에서 겨우 한국적 정서가 빠진 인류 보편의 주제를 선택했다고 비난하는 국내의 비평가들은 무엇을 근거로 글을 쓰고 언론은 왜 실어나르는지 모르겠다. 독특하지도 않고 상식적이지도 않은 '비평'을 작품에 대한 리뷰로 회자되게 만드는 한국의 미디어는 정치 사회 수준 만큼이나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의 설국열차에는 자본주의의 빵빠레 미디어에 대해서는 차가운 냉소를 보내고 있다. 








간단히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혹한의 시대에 빠져버린 인류는 초고속 열차에 몸을 실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생존힐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열차 안에는 각 칸마다 역할과 등급에 따라 차등이 되어 있고 꼬리칸에는 최하층민이 살고 있으며 앞으로 갈수록 신분 상승과 삶의 쾌적함이 보장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열차가 달리고 운영될 수 있는 핵심은 가장 앞칸이며 거기에는 기차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엔진과 이것의 개발자 윌포드가 있는 것이다.


단백질로 연명하며 통제와 억압으로 벌레같은 생활을 하고 있던 꼬리칸 사람들은 앞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이것의 목표는 칸과 칸 사이의 문을 열어 맨 앞칸에 있는 엔진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허접한 보안요원들을 제압하여 성공하는 듯 하지만 핵심에 다가가면서 무시무시한 반격을 맞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질서를 강조하는 법 체계로서 꼬리칸 사람들은 통제하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저항하니 다음에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무자비한 탄압이 있고 그것마저 돌파하니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편의와 쾌락을 일정정도 제공하며 동화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경제 위주의 모델로서 생산과 소비 모두가 '개체수', 즉 인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사람들의 요구가 아니라 시스템의 필요에 따라서 인간을 제거해야하는 순간에 다다르면 무자비한 인간 청소는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설국열차는 이 과정을 각 칸의 배경과 인간의 모습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자신을 포장하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전략으로 저항하는 인간들을 탄압하고 막아서는지 적나라하게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을 꿈꾸는 인간은 서로 단결하고 협력하여 적을 물리치기 위해 오랜시간 기다리게 된다. 








분노가 쌓이고 그것이 폭발하면 1차적 질서유지를 맡았던 공권력은 무기력해진다. 설국열차에서는 이들은 총알없는 보안요원들로 묘사하고 있다. 총알 없는 보안요원 그것은 통제의 상징인 것이다.  그들은 '질서와 법'이라는 가치로서 인간을 억압하지만 그것은 조금의 용기와 지략만으로도 충분히 뚫어낼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승리는 잠깐이며 억압받는 인간, 꼬리칸의 인간들이 기차의 엔진, 자본주의 핵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술'도 필요하다. 열차와 열차를 잇는 문을 보안전문가(남궁민수 = 송강호)의 도움을 얻어 하나씩 열어 가지만 때론 열지 말아야하는 문을 열었던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가장 긴장감이 감도는 대목, 열차의 무장세력, 자본주의 막강한 수호자들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기다리는 단계가 있다. 사람의 쪽수, 단결의 힘으로 올라온 인간도 무서운 대상 앞에서는 두려워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민중에게 두려움은 곧 희생을 의미하며 이 칸에서는 꼬리칸 사람들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이와같은 무장세력도 많은 사람들의 힘과 아이디어가 만나면 이겨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에 대한 절박함은 사람들을 강인하고 영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피해는 협상을 위한 소수에게 기회가 돌아가게 되고 일부의 사람들만이 열차의 엔진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나가면서 한가롭게 정원을 가꾸는 사람, 일본의 스시를 먹을 수 있는 식당, 그리고 행복한 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칸을 보게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청각 교육, 미디어를 통해 설국열차가 인류를 위한 최고선물이며 이것을 만든 윌포드는 신과 같은 존재라는 쇄뇌교육을 받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봉준호 감독도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힘으로 법과 질서, 총과 칼, 그리고 미디어의 해악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이이들에게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는 '시스템' 교육과 노래로 까지 따라 부르게 만드는 찬양 작업, 그것은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유지시키기 위한 쇄뇌교육인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질서'를 잘 지키고 본분(?)을 잘 지키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롭다? 그러나 이것은 앞칸에 사는 상층민을 위한 교육인지 몰라도 꼬리칸 하층민에게는 자기들의 자유, 평등, 행복을 희생하여 지탱하는 사회의 부조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극단적 자본주의는 하층민에게 아예 교육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으니 더욱더 큰 분노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혁명을 꿈꾸며 나아온 이들이 충분히 분노하고 동화되어가고 있을 즈음에 시스템은 가장 혁명적인 무기인 '총'을 통하여 다시금 힘의 균형을 맞추려한다.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총이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되는 것이다. 꼬리칸의 후방 사람들은 총에 의해서 진압당하고 개체수 조절의 당사자들이 되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전진하고 있는 소수의 꼬리칸 사람들 뿐이다. 최후에는 꼬리칸의 지도자 커티스, 보안전문가 남궁민수, 그의 딸 요나만 남게 된다. 그들에게 이후에 보여지는 칸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쾌락이다. 병폐이면서 달콤한 유혹인 클럽과 마약의 공간들이다. 


그리고 이들 3명은 최후의 목적지 윌포드와 엔진이 있다는 맨 앞칸 문 앞에 도달한다. 남궁민수는 앞칸에 가지 않고 기차 밖으로의 탈출을 꿈꾸고 커티스는 타의에 의해 윌포드 앞으로 가게된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아쉬움은 이 장면인 것 같다. 나는 맨 앞칸에 엔진만이 있기를 바랬다. 윌포드는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환영에 불과하고 실제는 기차를 가게하는 비인격의 엔진이 이 모든 시나리오의 창조자며 지배자이길 말이다. 다소 생뚱맞겠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이 인격이 아닌 것처럼 엔진이 역시 인격이 아닌 것은 맞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 앙상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소수의 사람들이 창조하고 유지하며 지배한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초기에는 사람에 의해서 지배되어질 수 있었지만 현재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했다는 생각을 한다. 자본주의는 스스로가 번식하고 확장하여 소수의 탐욕에 충실하고 다수의 억압을 충실히 수행하는 시스템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반부의 윌포드가 잠옷 차림의 스테이크를 써는 장면을 보면서 영화가 가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폭로적 관점이 다소 '코믹'스러워졌다. 이 영화의 원작이 코믹스이기 때문에 가지는 태생적 한계였을까? 








여하튼 맨앞칸에서 주인공 커티스와 남궁민수. 요나의 한바탕 소동을 거친 다음 열차는 선로을 이탈하여 폭발하게 된다. 사고 후 인류의 새로운 생존자 요나와 흑인아이는 생태계의 흰곰을 보면서 관객에게 희망을 심어준다. 


헐리우드 영화 중에 황인종과 흑인이 최후의 생존자 또는 인류 구원의 종이 되었던 적이 있었는가? 십중팔구 범죄인은 아랍 또는 유색인종이고 구원자는 백인이었던 헐리우드 영화들에 익숙한 관객에게 요나와 흑인아이의 마지막 걸음걸이는 사소한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봉준호의 힘, 한국 영화의 힘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이 작정하고 만든 계급투쟁의 영화(?) 인류 보편적 소재가 천박한 한국사회에 훌륭한 메세지를 던질 것이라고 본다. 설국열차를 단순히 오락영화로만 본다면 꼬리칸에서 앞칸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의 긴장감, 액션 등에 재미를 느끼겠지만 아마도 보고 나면 무엇인가 자신이 꼬리칸의 사람이 아닐까라는 뒷끝이이 남는다면 충분히 성공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갖혀 있고 우리의 꿈을 실현하기 보다는 소수의 탐욕을 위해 우리의 자유와 평등이 감시당하고 제어당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추리하게 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최대 히트작 '괴물'의 상징이 어쩌면 '자본주의 시스템'이지 않을까라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 '괴물' 중에서 ,모든 사진 출처 다음영화]





갑자기 한강에서 서식하다 뛰쳐나온 '괴물', 당시 영화를 보면서 다소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설국열차를 보고 과거 괴물을 다시 회상해보니 이제 우습지만은 않은 것같다. 감정도 없고 차디찬 설국열차의 엔진과 오버랩되는 괴물은 냉혹한 자본주의 시스템이었고 이것은 자비와 관용도 없고 단지 자기가 목표로 하는 대상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버리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그렇게 만만한 영화가 아니다.


나비오의 영화이야기